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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렴교육-역사속청렴이야기8

부서
도로과
작성자
등록일
2009-03-19
조회수
3669
첨부파일

수명 늘린 음덕’과 ‘홍계관 점 마을’

상진(尙 震)은 벼슬이 높아 귀하게 되어도 생계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곳간이 무너져 가솔이 수리할 것을 의논하자, “고쳐 놓은들 무엇으로 채우겠느냐”며 웃었다.   집에 도둑이 들어 들키면 도리어 불쌍히 여겨 “주리고 떨면서 쪼들리다가 하는 수 없었겠지”라며, 훔친 물건을 도로 내어주며 타일렀다. “네가 정 어렵거든 나를 찾아오너라” 고려 태조 왕건이 삼국을 통일한 뒤, 백제 사람들이 여러 번 소동을 일으키므로 그들에게 동물 글자로 성을 주어 욕보이었는데, 상진의 선대에 ‘코끼리 상(象)’으로 성을 얻었다가 ‘상(尙)’으로 고쳤다. 상진의 증조부(상 영부)가 임천에 살 때 재물이 많았는데, 꾸어주고 받아들이고 하다가 늘그막에 그 문권을 불살라버리며 말했다. “나에게 후손이 있을 것이다.”   아버지(상 보)가 늙도록 아들이 없어서 몸소 ‘성주산’에서 기도드려 이듬해 상진이 태어났다. 다섯살에 어머니를,  여덟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자형(하산군 성몽정)집에서 자랐다. 열다섯 살이 지나도 호탕하여 말달리고 활쏘기만하다가 업신여김을 당하고 분발하여 열 달 만에 문리에 막힘이 없더니 문과에 합격하여 마침내 영의정에 이르렀다. 16년간 정승 업적이 황희 허조 다음이라는 후세 평을 받았으나, 명종조의 문정왕후 용사에 즈음하여 윤원형이 권세자루를 휘두름에, 깊은 밤에도 홀로 누워 한탄했다. “이 늙은이의 이번 행차는 매우 어중간하다.”

 

 

점 잘 치는 홍계관이 상진의 지난 일을 다 맞추었는데 죽을 해도 알려주면서 마침 호남에 가있게 되었기에 서울서 오는 이가 있으면 꼭 상진의 안부를 물었으나 부음은 없었다. 1년이 지나도 그에게는 아무 탈이 없으니, 상경하는 길로 상정승 댁에  인사를 드렸다.  “내가 자네 점괘를 믿고 금년에 다 된 줄 알았더니 어찌 맞지 않아 살아 있네.”  “음덕(陰德)으로 수명을 늘린 이가 있으니 대감께 그런 일이 있었을 겁니다.” 내가 수찬(修撰)으로 있을 적에 퇴근길에 노상에서 붉은 보자기를 주워보니 순금 잔 한 쌍이라 가만히 간직해 두고 대궐 앞에『아무 날 실물한 자는 나를 찾아오라.』방을 붙였다. 이튿날『대전 수랏간 별감이온데 조카 혼인이 있어 몰래 주방 술잔을 내왔다가 잃어버렸으므로 후일 탄로 나면 죽을 목숨입니다.』라기에 다만 그 순금 술잔을 내 준 것뿐이라네. “그렇다면 대감 수명을 연장한 것은 이 때문일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로부터 15년 뒤에 상진은 세상을 버렸다. 일찍이 자제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시장(諡狀:시호를 청하면서 올리는 일생行蹟행적)에 달리 적을 것이 없다.〔만년에 거문고 타기를 좋아해 얼근히 취하면 감군은(感君恩) 한 곡조 타기를 즐겼다.

 

 

홍윤성(洪允成)은 성질이 사나운데다가 수양대군(세조)를 도와 김종서를 제거한 공을 믿고 멋대로 사람을 죽였다. 제집 밖 시내에서 누가 말을 씻긴다고 당장 마부와 말을 요절내었다. 그 집 앞에 말을 타고 지나가는 사람은 귀천을 가릴 것 없이 붙잡혀 죽임을 당했다. 크게 저택을 지어 대궐에 버금갈 만했는데 세조가 친히 ‘경해(傾海)’라는 당호를 지어 주었다. 그가 출세 길이 열리는 길이 두 갈래였으니, 수양대군이 제천정에 나와 놀고 있을 때 그 용력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고, 또 하나는 족집게 점쟁이 홍계관을 만난 것이었다. 처음엔 복채가 적어서인지 심드렁하다가 나중엔 “선비께선 신하로서는 최고의 지위에 오를 극히 귀한 분”이라며 극찬했다. 과거급제를 장담하며 형조판서(법무장관)가 될 것을 예언하며 자기 아들 구명을 부탁하며 노자(여비)까지   바치며 칭송해 마지않았다. 한분은 지선(至善)하고, 한사람은 극악(極惡)하여 전자는 청렴하고 후자는 가렴주구의 본보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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