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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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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참지리설을 반대한 어효첨일가의 무덤

'잘 되면 내 탓이고 잘 못 되면 조상탓' 이라든가, '명당자리에 무덤을 쓰지 않아 가문이 쇠퇴하게 되었다.', '꿈에 돌아가신 조상님이 나타나, 있는 곳이 너무 음습하니 다른 곳으로 옮겨달라고 하여 이장하였다.' 라고 하는 이야기들을 우리는 자주 듣는다. 그래서 풍수지리설하면 금방 떠올리는 것이 '명당찾기'이다.

본래 풍수지리설이란 생기가 충만한 길지(吉地)를 택하여 도읍, 궁택, 능묘를 경영해야 한다는 것과 그러면 그 결과 왕조나 가문이 복을 받아 번성하고, 그 반대면 화를 입게 된다는 신앙이다.

통일신라말 고려초에 활동한 도선(道詵)이 풍수지리설을 완성한 후 고려 태조는 이에 따라 도읍을 서경(평양)으로 천도하고자 하였고, 후백제 지역은 그 형세가 국가를 배역하는 이들을 만들기 때문에 후백제유민을 등용시키지 않고자 하였다.

또한 조선이 건국된 후, 한양으로 천도하는 과정에서도 이 풍수 지리설을 따랐던 것이다. 이 외에도 가문의 영달을 위해 묘소를 정할 때라든가 주거지를 잡을 때 등 어떻게 보면 우리 사회의 일상생활 속에 풍수지리설은 지대한 영향을 미쳐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풍수지리 사상에 대해 적극적으로 유교의 예학을 통하여 반대한 사람 중의 하나가 여기서 이야기하려는 조선 세종대와 세조대에 활약했던 어효첨이다.

문효공(文孝公) 어효첨은 집현전 직제학을 지낸 어변갑(魚變甲) 의 아들이며 당시 좌의정 박은의 사위로서 가학(家學)에 영향을 받아 문명을 날렸다. 성리학 특히 예학에 밝았는데 예법을 존중하여 당시 유행하던 풍수지리설을 철저히 배척하였다. 세종 때에 산가지리설(山家地理設), 즉 풍수지리설의 그릇됨을 거론하였는데 예를 들면 청계천에 오물이 많아 더러워지게 되자 이에 대해 이현로가 풍수설에 의해 천거(川渠)에 오물을 던지는 것을 금하여 물을 깨끗하게 할 것을 주장하였다. 어효첨은 도읍에 흐르는 물은 당연히 더러워지기 마련이므로 이현로의 논리대로 하기란 불가능하다고 하여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였다. 세종은 어효첨의 말을 논리가 바르다고 하여 받아들였으니 그의 논리는 이렇게 명백하고 정대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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