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우리 외교를 빛낸 인물徐熙[942-998]의 생애와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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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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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행사 개요
o 외교통상부에서 이천시청과 함께 올해 처음으로 「우리 외교를 빛낸 인물」서정 사업을 펼치며, 올해에는 ‘충무공 서희’가 선정되어 이를 홍보함.
o 행사 일정
- 2009.10.9 : 서희 동상 제막식(외교안보연구원 광장)
학술 논문 시상식(외교안보연구원 대강당)
- 2009.10.9-11.1 : 서희 상상화 공모전 (외교부 블로그 ‘외교나래’)
- 2009.11.9 : 학술회의 개최 (외교통상부 국제회의실)
2. 생애와 업적
서희는 내의령 필의 둘째 아들로 서기 942년(태조 25년) 이천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 이름은 염윤(廉允)이었다. 그는 서기 960년(광종 11년) 18세의 나이로 갑과(甲科)에 급제하여 광평원외랑(廣評員外郞)이 되었다.
서희는 서기 972년(광종 23년) 내의시랑(內議侍郞)의 직책으로 있던 중, 국교가 단절된 송과의 화친을 위해 대송사행(對宋使行)의 총책임자로 파견되었다. 이 때 송의 태조(太祖)는 그의 비범한 자질을 높이 평가하여 검교부상서(檢校兵部尙書)라는 고위(명예)직을 내리기도 했다. 이후 그는 42세 때인 서기 982년(성종 2년) 병관어사(兵官御事)가 되고, 같은 해 내사시랑(內史侍郞)으로 승진하였다.
서희가 남긴 가장 뚜렷한 외교적 업적은 서기 993년(성종 12년) 당시 동북아의 강대국이었던 거란이 80만 대군으로 고려를 침입하자 왕명을 받고 중군사(中軍使)가 되어 적군을 막았던 일이다.
당시 성종이 서경(평양)으로 거동하여 중신회의를 열고 대비책을 의논하였을 때, 거란군의 위세에 위축된 대부분의 신하들은 거란의 요구대로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주고 화친을 맺는 것이 좋겠다고 주장하여 국왕도 이러한 중론을 따르려고 했다.
그러나 서희는 앞장서서 중론을 반대하고, ‘적들과 한번 싸워 본 후에 화친을 의논해도 늦지 않다’고 국왕을 설득하였다. 그리하여, 거란과의 협상에 앞서 고려가 ‘안융진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서희의 ‘先항전 後협상론’이 수용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어서, 서희는 단신으로 적진을 찾아가 적장 소손녕과 담판하여 80만 대군을 물러가게 하고 강동 6주를 획득함으로써, 위기에 처한 국가의 운명을 구해 내었다.
서희는 뛰어난 판단력으로 당시 국제 정세를 정확히 이해하였고 거란의 침입의도(송·고려간 군사협력 가능성 차단)도 분명히 통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듬해부터 서희는 쉴새없이 북진 개척에 나서, 압록강 남쪽 경계내까지 내려와 살고 있던 여진족을 몰아내고 성을 쌓아 방비를 튼튼히 했다. 이때부터 비로소 고려의 영토가 압록강 연안까지 미치게 되었으며, 이후 거란의 3차 침입시 고려가 거란을 격퇴하는 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서희가 서기 998년(목종 1년) 7월 27일, 55세의 나이로 별세하자, 나라에서는 국장(國葬)의 예를 갖추어 장례를 지내고 장위공(章威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서기 1033년(덕종 2년) 태사(太師) 벼슬이 추증되고 서기 1027년(현종
18년) 성종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조선 명종(明宗) 때에는 이관의(李寬義), 김안국(金安國)과 함께 이천 설봉서원(雪峰書院)에 제향되었다.
자료제공 : 외교통상부 정책총괄과 ☎ 02-2100-7273 |
